본문 바로가기
국내외여행

여순 사건을 찾아서

by 쌍둥아빠^^ 2005. 9. 5.
728x90
여수하면 아름다운 자연과 공업단지도 생각나지만 우리세대는 잘 모르는 막연한 일이 여수순천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민족역사에 6ㆍ25, 제주도 4ㆍ3사건과 같은 맥락의 이념적인 갈등에 의한 사건으로 우리의 아픔이다. 1948년 10월11일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는 정부의 제주도 4ㆍ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친일파 척결과 분단정권반대를 주장하면서 거부하자 정부의 진압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들 2,500여명이 숨진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은 경찰서와 관공서 등 여수시내를 장악하고 순천을 거쳐 광양ㆍ곡성ㆍ구례ㆍ벌교ㆍ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초기에 진압군에 밀린 정부군은 5개 연대를 투입하여 박격포와 장갑차, 경비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여수와 순천지구를 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사상적으로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처형하고 진압군은 반란군에 동조하거나 혹은 자세한 동조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민간인을 처형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사건의 비극은 같은 지역에서 생활하든 사람들간에 반란군의 세력하에서 혹은 진압군의 세력하에서 서로를 반대자로 지목하면서 쉽게 그들의 자유와 목숨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역사회의 기반인 공동체의식이 무너지고 일반시민의 마음이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이 이 지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당시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되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서로의 상처는 아문 듯 보이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한 규명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다음세대에게도 커다란 짐을 지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여순 사건의 현장 찾아가기

ㆍ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 1948년 10월 23일 인민재판이 열려 주요 우익인사 처형
ㆍ신월동 :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주둔지
ㆍ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 1948년 10월말에서 12월 초순까지 여순 사건 당시 가장 많은
학살이 일어난 곳
ㆍ만성리굴 앞 : 1948년 11월 많은 수의 인명을 처음을 집단학살한곳
ㆍ서국민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 : 진압군의 본부위치
ㆍ호명동 야산 :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부역자나 적극 가담자 100여명을 사살한 곳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