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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고흐 이야기

by 쌍둥아빠^^ 2007.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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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1853년 3월 30일, 빈센트는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마음이 순한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고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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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시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습니다.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 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 합니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아 분위기였습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는 몹시 행복했고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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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빈센트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되는데
외로운 이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을 약속한 상태였고
크게 낙담한 빈센트는 결국 영국을 떠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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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시절....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입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써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레 묻어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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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입니다.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되는데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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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절...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빈센트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링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 주고 인도해 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습니다.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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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시절....
나는-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
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1888년 아를로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렀습니다.
진실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으나,
차차 라셸 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습니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 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리를 몇 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 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
해가 뜨면 질 때까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 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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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 주는 돈으 로 살았고 절약을 위해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빈센트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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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경찰이 빈센트 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곧 병 원에 수용되었고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빈센트는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습니다.
생-레미 오베르시절....
생-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으나,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런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테오의 요청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 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사용할 방이었고,
른 하나는 빈센트가 기거할 방이었습니다
빈센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즈음 빈센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11월, 빈센트는 제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 점 풀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1월 30일 그림 여섯 점을 보냅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실리게 됩니다.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습니다.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습니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일한 글이기도 했습니다.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고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납니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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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웠다고 합니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고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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