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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여행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by 쌍둥아빠^^ 2005.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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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를 답사하다보면 우리나라 남해안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을 다른 곳 보다 많이 볼 수 있고 임진왜란과 관련된 지명을 가진 곳도 많다. 이것은 이곳 여수가 외부로 노출된 해안지역의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서 고려말부터 많은 왜구들이 이 지역에 출몰해서 약탈을 일삼아 수군의 기지로 부각되는 역사성과 관련 있다. 이에 여수는 조선 성종 10년(1479)에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에 없어지기까지 400여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중심지로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를 맞게 된다.

특히 임진왜란의 전쟁 중에 경상도 수군이 거의 자멸의 지경에 처해있을 때 이곳에 일찍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전 대비로 이 지역은 왜적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며, 선조 24년(1591)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이곳을 중심기지로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경상도 지역에 출병하여 왜적의 수군을 격파하며, 전쟁 이후에는 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수군통제사를 겸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의 중심이 된다.

스위스의 경우 스위스를 구한 월리암텔의 이름을 딴 탐방루트를 정해놓고 많은 청소년들과 관광객이 그 루트를 돌아보면서 스위스 독립정신을 생각해보는데, 우리나라도 남해안 전역에 널려있는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정비해서 충무공 루트를 만들어 청소년들의 학습의 장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여수지역에 산재해 있는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을 중심으로 여수내의 충무공 루트를 찾아가 보자.



- 충무공 루트

진남관 → 좌수영대첩비/타루비 → 자산공원 → 충민사/석천사 → 무술목 →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 오충사 → 무술목



- 진남관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을 때 전라좌수영이 있던 자리에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진남관(鎭南館)이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전라좌수영의 성곽이 있었을 텐데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조선 후기에 전라좌수영 내에는 600여 칸으로 된 78동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진남관이 유일하다. 진남관은 돌산대교를 건너 돌산공원에서 여수시 전경을 바라보면 뒤에 종고산을 배경으로 한가운데 압도적인 모습의 대형 건축물이 눈에 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전라좌수영의 중심건물인 진해루(鎭海樓)가 들어서 있었다고 하는데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리고 지금의 진남관은 선조32년(1599)에 새로 지었다가 그 후 화재로 소실되는 등 여러 차례 증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당시 임금이 사용하던 궁궐을 제외하고 지방에 세워진 목조건축물 중 가장 큰 건물로 우리나라 고건축물 중 바닥면적이 가장 큰 건물로 알려져있다.

중앙동로타리에서 진남관을 향해 올라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망해루(望海樓)라는 건물인데 원래 전라좌수영의 문루역할을 했던 건물이지만 일제시대에 철거된 후 1991년 새롭게 지었다고 한다. 망해루에서 계단을 올라가 문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건축물인 진남관을 마주하게 된다. 둘레가 2.4m의 기둥이 68개가되고 전체 건물길이만도 75m에 높이가 14m의 초대형 건물이다. 그 웅장함에 이곳이 전라좌수영의 지휘본부 건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을 영접하는 객사(客舍)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여수 앞 바다와 돌산대교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건물이 전라좌수영의 지휘본부 건물이었다고 상상해본다. 마당을 지나 입구의 울타리 옆에 여수 돌 사람(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서있는데, 여수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돌장승(벅수)이다. 충무공은 이런 돌 사람을 곳곳에 세워 적을 교란시켰다고 하고 7개를 세웠는데 현재는 이것만이 남아있다. 외로워 보이고 바다를 향하지 않고 건물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색하다. 조선말기에는 여수 공립보통학교로 이용되었고, 일제시대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며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 좌수영대첩비

진남관에서 여수경찰서 방향의 언덕을 올라서면 건널목이 보이고 옆에 작은 표지판이 좌수영대첩비라고 쓴 화살표가 보인다. 그곳에서 비탈길을 올라가면 석축이 쌓인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돌아서면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가 나란히 들어있는 비각이 있다.

이곳은 고소대(姑蘇臺)가 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작은 정원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몇 그루의 동백이 지키고 있다. 비각 안에는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가 가운데 놓여있고 왼쪽에 동령소갈비(東嶺小喝碑), 오른쪽에 타루비(墮淚碑)가 놓여있다.

거북받침에 뿔달린 용이 새겨져있는 지붕과 그 위에 연꽃봉우리가 있는 높이 3.05m 폭1.24m의 좌수영대첩비는 국내 비석 중에 최대로, 옥포ㆍ노량ㆍ한산ㆍ명량 등지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의 행적과 활약이 기록되어있다. 비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기록되어있는데 보통 충무공대첩비, 좌수영대첩비 등으로 불려진다.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6년이 지난 1603년에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로 비문에 중국 양양 사람들이 양호 장군의 덕을 생각하여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취해 타루비라 명명했다고 써있다.

옆의 좌수영대첩비에 비해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생사를 함께 했던 그의 부하들이 만들어준 비석으로 작지만 그들의 힘이 느껴지는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비석 모두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어있다. 이곳 고소대에서 바라보는 여수항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 자산 공원

좌수영대첩비에서 중앙초등학교로 내려와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공원이 자산(紫山)공원이다. 자산이라는 이름은 일출 때 산봉우리가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은 충무공과 큰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충무공 동상이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서울의 한폭판까지 우리나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충무공 동상이지만 이곳에서 보는 충무공 동상은 남다르다. 동상 자체의 조형미나 엄숙미는 떨어지지만 이곳이 충무공이 활약한 여수에 서있다는데 의미를 두고 이곳에 올라 여수앞바다 일대를 바라보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 충민사/석천사

여수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다 중앙여고 앞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래산 아래 충민사가 위치한다. 멀리 여수 신항과 오동도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하여 건립한 곳으로 선조가 직접 이름이 짓고 현판을 내린 충무공과 관련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당이다.

경남 남해 노량의 충렬사보다는 62년,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먼저 세워진 사당으로 의미가 있다. 옆에 있는 석천사는 충무공의 영을 모신 사찰로 승병으로 활약하여 큰 역할을 한 옥형대사와 자운선사가 충무공 사후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당을 만들고 암자를 건립했다고 한다.



- 무술목

돌산대교를 건너 1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굴전을 지나 양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무술목 혹은 무실목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한다. 이곳은 북쪽의 소미산과 남쪽의 대미산 사이에 폭이 좁은 지형을 가리키는 것으로 목(項)이라 불리는 지명이다.

지금은 양쪽에 제방을 쌓아 밀물이 되어도 폭이 좁지 않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썰물때면 바다 밑의 암반이 드러나 양쪽지역의 사람들이 걸어서 건너다녔고, 밀물이 되면 바다 속에 잠겼던 곳이다. 목(項)은 지형적으로 바다에 떠있는 섬과 육지를 연안류에 의해 흙과 모래가 운반되어 사주로 연결된 육계도라는 지형을 보통 말하는데 돌산읍의 금봉리 항대마을도 그런 이름을 사용하였다. 충무공은 선조31년(1598년) 11월 19일 명량해전에서 패하고 돌아가는 왜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여, 멀리서 해협으로 착각하고 들어섰다 배가 좌초하자 육지로 달아난 왜군을 매복하여 섬멸했는데 왜선 60여 척과 왜군 300여명 섬멸하는 전과를 올린 곳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ㆍ무서운 목ㆍ이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무실목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8년 소미산아래 동백산장 입구에 이충무공유적기념비를 세워놓았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양쪽 땅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곳의 의미인 ㆍ뭍의 목ㆍ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ㆍ무서운 목ㆍ의 역사성과 ㆍ뭍의 목ㆍ의 지리적인 성격을 놓고 선택하라면 지리를 전공한 교사이지만 역사성에 선택권을 주고싶다. 그만큼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충무공을 그리워함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수시에서는 이곳을 관광단지로 개발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는데 역사성과 지리적 특성을 고루 갖춘 곳이며 이곳에서 보는 해돋이는 일품이며 600~700m의 동쪽 해안은 큼직한 몽돌이 깔리고 바닷물도 잔잔하며 물이 빠지면 모래사장도 드러나 해수욕장으로도 좋다. 또한 해양ㆍ수산 문화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전시하고, 학생들의 자연 학습장으로서 다양한 시설을 갖춘 전라남도 수산종합관이 위치하고 길 건너에는 약간은 촌스럽지만 놀이공원도 갖추고 있는 돌산읍 관광의 출발점이다. 이 무술목을 한눈에 보려면 옆의 대미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것이 좋다.



-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돌산대교를 다시 건너 서쪽의 신월동의 새로 생긴 넓은 도로를 따라 선소가 있는 방향으로 가면 오른쪽에 송현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에 계시던 80세가 다된 어머니 변씨와 아내 방씨와 가족을 송현마을에 모셔와 살게 했던 곳으로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없으며 충무공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난중일기의 친필내용을 그대로 옮긴 비석이 세워져있다.

필자는 이번 답사때 이곳을 찾아 가보았으나 동네의 골목을 잘못들어가 개들에게 쫓기며 돌아 나와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무인 충무공의 또 다른 인간적인 면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소이다.



- 오충사

송현마을에서 시전동으로 향하는 길에 오충사가 있다. 오충사는 조선 현종 13년(1847)에 정재선이 이 충무공을 따라 종군하다 전사한 그의 선조 정철의 공을 기리기 위해 당시 가곡리에 사충사를 세워 충절공 정철ㆍ충의공 정춘ㆍ충숙공 정인ㆍ충정고 정대수 등 4위를 모셨던 곳이다. 그 후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1년 창원 정씨 문중과 이곳사람들이 현 웅천동에 다시 세울 때 충무공을 주신으로 배향하여 오충사라 개칭하고 매년 음력 3월16일에 제를 올린다.



- 거북선의 고향 선소

오충사에서 여수1청사로 내려와 로터리에서 소호만을 향해 가면 왼쪽 망마산 아래 선소 유적이 있다. 선소(船所)는 배를 만들던 곳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최신 전함인 거북선을 만들던 곳이기도 하다. 이 선소 마을은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조성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ㆍ이곳 선소는 전라좌수영의 직할선소가 아니고 전라좌수영관하의 순천부 선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북선이 건조되었다는 확증된 문헌은 없으나 충무공의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여수)와 이곳 순천부 소속 선소, 그리고 돌산의 방답진 선소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ㆍ라고 하였는데 결국 이곳에서 거북선을 직접 제작했다는 근거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거북선이나 전함 등이 건조 혹은 수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어떻든 이곳을 찾아보면 소호만의 거울같이 잔잔한 바닷물과 육지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 쪽으로 노출되지 않은 위치, 그리고 전라좌수영의 인접지역으로서 거북선의 제작장소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돌장승(벅수)가 2개 나란히 서서 들어오는 방문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멀리 선소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우선 안의 흙을 파내고 배가 정박할 수 있게 만든 항구시설인 굴강과 수군의 훈련시설이면서 관리관청인 세검정(洗劍亭)이 보인다. 좁은 해안도로 옆의 기존의 마을 집은 일부 헐고 새로운 관광지를 조성하는 곳을 지나 선소로 들어선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굴강(掘江)이다.

굴강은 성 주변에 만들었던 해자(垓子)와 같은 것으로 인공적으로 땅을 파내 바닷물이 들어오게 하여 배를 정박시키도록 한 일종의 인공호라고 할 수 있다. 둘레 40m정도의 원형으로 바다로 나가는 입구는 약 9m의 폭을 유지하며 깊이는 5~6m정도로 추정된다. 이곳은 거북선 두척정도가 들어가는 크기라고 하는데 기왕 충무공의 거북선 유적지로 개발된다면 모형 거북선이라도 한척 정박시키면 좋은 학습의 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굴강 옆에도 2개의 벅수가 놓여있는데 지금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오른쪽의 투구를 쓴 벅수는 남해안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수군형의 벅수이다. 세검정 앞 바다로 내려가면 약 2m 높이의 돌기둥이 서있는데 정박중인 배를 묶어두는 계선주(繫船柱)다. 보통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는 원형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사각형이며 마을 항구의 끝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계선주가 아니고 벅수로 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풍화가 심해 사람의 모양을 조각한지는 알기 어려우나 만약 벅수라면 마을 입구에 2개, 굴강 옆에 2개 망마산 기슭에 2개, 그리고 이곳 바닷가에 1개를 포함 모두 7개의 벅수를 세워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바다로부터의 위험에서 보호받으려는 이곳사람들의 마을을 읽을 수 있다.



- 여수와 일본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도 여수는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연관성이 있다. 충무공의 유적을 제외한 일본과 연관성 있는 지역을 찾아가보자


- 장군도

돌산섬과 여수항 사이에 작은 섬이 장군도다. 장군도는 여수항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조류로부터 보호하고 항구로서의 기능을 좋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름에서 느끼듯이 역사성이 큰 섬이다. 돌산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여수와 돌산을 오고가는 교통수단은 여수시내의 중앙동 앞 선착장에서 돌산도의 나루터인 진두마을을 연결하는 도선이 오고갔으며 많은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다.

지금도 작은 도선이 주로 승객을 간간이 수송하고 있으며 저렴한 돈에 여수항을 간단하게 배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여수 여행에 꼭 권하고 싶다. 이 도선은 여수와 돌산을 왕복하면서 장군도에도 들리는데 장군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다. 풍수지리에서 여수는 용 세 마리가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여의주가 장군도이다.

둘레 600m의 작고 무인도지만 일제시대에 1천 그루의 벚꽃을 심어 봄이면 벚꽃이 장관이다. 장군도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수중석성(水中石城)이 있는데, 돌산도와의 사이 바닷속에 큰돌을 넣어 약 100m 정도의 둑을 만들어 놓았다.

이 성(城)은 연산군3년(1497)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 장군이 당시 왜구들이 여수지역에 자주 쳐들어와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는 것을 보고, 그들의 침입로와 퇴로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 왜구들은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의 빠른 물살을 이동 통로로 이용했었는데 이곳에다 커다란 돌을 날라 바다 속에 성을 쌓아 왜구들이 이동을 막았고 곧 ㆍ방왜축제(防倭築提)ㆍ인 장군성이다. 여수에서 3년을 지낸 이량 장군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이 고장을 떠나게 되었고 짧은 기간에 여수를 위해 많은 일을 한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516년 섬안에 ㆍ장군성비(將軍城碑)ㆍ와 ㆍ방왜축제비(防倭築提碑)ㆍ를 세웠다.

그 후 섬의 이름도 장군도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흔히들 장군섬은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있는데 사실은 이순신 장군보다 앞선 이량 장군의 유적이다. 현재는 관리의 미비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그래도 물이 빠지면 성의 윤곽을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순신과 이량 장군과 같이 거창한 말보다는 지역과 주민을 위해 준비하고 사랑해주는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시대이다.



- 일본군의 주둔 흔적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은 남해안일대에 주둔하면서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을 경계하였다. 우리로서는 떠올리기 싫은 역사이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일제말에 여수는 일본군이 연합군의 상륙할 수 있는 지점으로 보아 여수항을 주심을 주변의 섬과 해안에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여수 건너편 남해의 선구해안에도 진지를 구축하면서 만들어 놓은 동굴이 있는데 여수의 돌산지역에도 일본군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돌산섬의 무술목아래의 대미산의 정상에는 달암산성(達巖山城)이 있으며 달암산성의 우물에서 무술목으로 내려가는 길로 약 50m쯤 내려가 와 남해섬 사이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3개의 동굴이 만들어져있다. 한 개의 동굴은 깊이가 작으나 한 개는 옆의 다른 동굴의 입구와 연결되어 있으며 높이는 약2m에 넓이는 약3m정도가 되는 동굴이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 여수항으로 출입하는 선박을 감시하고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에는 좋은 위치에 동굴을 만들어놓았다. 대미산 일대와 계동마을 일대는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계동에는 해안포를 설치한 동굴도 있었다고 하는데 종전 직전에 미국의 B29폭격기가 여수 앞바다를 폭격하자 이곳에서 포를 발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향일암이 있는 마을인 임포마을은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지금의 군사시설 옆에 일본 해군 1개 중대와 인근에 육군 1개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 해군기지에서는 남해상의 음향 탐지를 위해 대마도까지 수중 케이블선을 설치 중이었다고 한다. 일본 육군은 향일암 밑에 포대 2기를 구축하고 포1대를 설치하였으나 나중에 대포는 계동마을로 옮기고 지금은 포대기지의 흔적만 남아있다. 향일암을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왼쪽의 소로 길을 따라 가면 타원형의 시멘트 구조물과 뒤로 호를 구축해놓은 흔적이 보인다.



- 옛 성곽

성곽(城郭)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쌓은 구조물이며, 이를 거점으로 국토를 방위한 중요한 시설물이다. 여수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성곽이 많아 확인된 것만 약 20여 개가 넘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끊임없이 많은 외부의 침략 즉 왜적의 노략질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중에는 잘정비된것도 있고 흔적 없이 사라진 것도 있지만 작은 석곽의 돌 하나도 그것을 쌓으며 적을 방어하려했던 조상들의 의지가 담겨있는 역사이다. 여수를 막아주는 돌산섬은 많은 성이 있는데 이중 가장 보존이 잘되고 전망이 뛰어난 성곽은 돌산읍 평사리의 달암산성이다.

359m의 대미산 정상에 위치한 성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멀리 여수항이 내다보이고 아래는 무술목과 군량미를 대어주던 둔전 마을이 한눈에 내려보이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성에는 동ㆍ서ㆍ북문은 있으나 남문이 없는데 그것은 남쪽으로 침입하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성의 남쪽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는데 정면에 바라보이는 전라좌수영이 있는 진남관과 통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여수시에서 산의 정상까지 월암마을 쪽에서 계단형의 길을 너무(ㆍ)잘 만들어 놓았고 무술목에서도 올라갈 수 있다. 돌산읍에 들어가면 읍사무소 앞에 돌산군 관청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고있지만 이 지역은 조선 중종18년 (1523)에 화양면 용주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고종32년(1895)에 폐진될때까지 전라좌수영의 최전초기지로 왜구의 길목을 지키며 바다방비의 요충지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그 흔적이 일부지역에 끊어지듯이 남아있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였으며 길이가 약 1.6㎞이고 높이가 6.27m의 성곽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첨사 1명을 포함하여 2,981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많은 건물이 있어 규모가 매우 큰 성곽이었다. 이곳의 서쪽 해안에는 넓은 굴강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 방납진 선소자리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설에 의하면 이곳에서 거북선과 많은 함정을 건조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둔전리 중앙초등학교앞의 야철지(冶鐵址)와 좋은 재목을 구할 수 있던 금오도가 가까이 있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을 생각된다.

앞으로 이곳은 거북선의 건조지로서의 여부를 확인하고 방납진 성과 선소자리인 굴강을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돌산의 새로운 역사적 명소로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에 고돌산진(古突山鎭)이라 불리는 옛 수군진(水軍鎭)이 있던 곳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 이곳에는 병선8척과 약 520여명의 군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돌산읍의 방납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을 생각된다.

이곳은 돌산도와의 사이에 가막만이 접하며 여수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그 군사적 의미가 크다. 이곳에는 성종21년(1490)에 돌산만호진성(突山萬戶鎭城)을 구축하였는데 고내리의 항구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 능선을 둘러쌓아 성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 성종때까지 화양면 용주리를 돌산 또는 돌산포라하고 지금의 돌산섬은 돌산도 혹은 방납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있는 돌산이라는 이름은 이곳 화양면 용주리 일대를 부르던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외에도 여수지역에는 계함산성ㆍ석창성ㆍ온동산성ㆍ호랑산성ㆍ신기산성ㆍ죽포산성ㆍ백야산성ㆍ고락산성ㆍ자산성성ㆍ죽암산성 등 많은 산성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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